작년까지만 해도 곧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날 듯했던 정세가 평창 동계올림픽을 거치면서 거짓말처럼 변화하여, 이제는 조만간 한반도 평화체제의 실현을 기대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지금부터 30년 전인 1988년 봄에도 한반도 평화 실현에 대한 요구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해도 역시 올림픽이 이 땅에서 개최되는 때였다.
서울올림픽의 개막을 앞둔 1988년 봄,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요구하는 대학생들의 학생운동이 뜨겁게 들불처럼 번져 갔다. 그해 서울대 총학생회 선거에서 ‘남북학생회담 판문점 개최’에 대한 공약이 나오면서, 통일운동은 곧 학생운동 전체로 확산되었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는 구호가 청년 학생들의 피를 뜨겁게 했으며, 서울올림픽을 ‘남북 공동올림픽’으로 개최하여 통일을 앞당기자는 요구로 발전했다.
한 해 전이었던 ‘1987년 6월 10일, 연세대학교 학생 이한열 군이 시위 진압 전경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경에 이르게 된 것에 항의하는 대학생들과 시민들은 거리에서의 시위에 이어 명동성당에서 5박6일 동안 농성했다. 이후에도 시민, 학생들은 대통령 간선제를 유지하겠다는 전두환 정권에 맞서 ’호헌 철폐, 독재 타도‘라는 구호를 걸고 연일 거리 시위에 나섰으며, 결국 6월 29일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겠다는 정권의 항복 선언을 받아 냈다.
불과 1년 전이었던 6월항쟁의 기억 속에 1988년 대학생들의 통일 운동은 전두환 정권에 이어 집권한 노태우 정권에게 위협으로 다가왔다. 특히 올림픽을 계기로 소련을 위시한 공산주의 국가들과 관계 개선을 통해 북한 포위를 기획했던 ‘북방 정책’과 충돌할 수 있었기 때문에, 결국 노태우 정권은 대학생들의 통일운동에 대해 탄압하기 시작했다.
정권과 학생들의 치열한 공방이 정점을 향해 가고 있던 1988년 5월 15일, 명동성당 교육관 옥상에 당시 서울대 화학과 학생이었던 조성만(요셉)이 나타났다. 대학 졸업 이후 사제의 길을 걷고자 했던 그는 ‘양심수 석방’, ‘공동올림픽 쟁취’ 등을 요구하며 할복, 투신했다. 군사 정권을 반대하고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주장했던 그는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아멘”으로 시작하여 “지금 이 순간에도 떠오른 아버님, 어머님 얼굴 차마 떠날 수 없는 길을 떠나고자 하는 순간에 척박한 팔레스티나에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한 인간이 고행 전에 느낀 마음을 알 것도 같습니다.”로 끝을 맺는 유서를 남겼다. 사제의 길을 걷는 대신 선택한 죽음이 자신의 신앙적 결단이었음을 밝힌 것이다. 5일장을 치루고, 30여만 명의 서울시민이 모였던 영결식을 마치고 행진하던 때, 하늘에는 그의 죽음을 받아 안는 듯, 신기한 햇무리가 나타났다.
<2013년 가톨릭청년회관에서 봉헌된 조성만 열사 25주기 추모미사>
그의 죽음 이후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사람들의 행동이 이어졌다. 1989년 3월, 문익환 목사의 방북이 있었으며, 그해 여름, 북한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당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를 대표한 외국어대 임수경의 방북이 있었다. 특히 임수경이 판문점을 통해 귀환할 때, 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서는 문규현 신부를 파견하여 함께 돌아오도록 했다. 그리고 50년 만에 정권 교체가 이루어져 집권한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과 제1차 남북 정상회담을 했으며, 이는 2007년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제2차 남북 정상회담, 그리고 올해 4월 제3차 남북 정상회담으로 이어졌다. 무심한 세월이라고 하지만 지난 30년 동안 조성만이 그토록 바라던 한반도 평화를 향한 노력은 꾸준하게 이어져 온 것이다.
그가 우리 곁을 떠난 지 30년이 되는 올해, 그토록 갈구했던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이 우리 곁에 훌쩍 다가왔다. 30년 전과 마찬가지로 올해 올림픽이 있었다. 이번에는 여자 아이스하키에서 남북 단일팀이 구성되었으며, 한반도기가 경기장에 휘날릴 수 있었다. 30년 전 대학생들이 외쳤던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는 구호는 남북 정상회담으로 실현되었다. 우여곡절이 있겠지만 북미 관계도 평화를 향하여 방향을 잡은 것처럼 보인다. 바야흐로 한반도는 지금 거대한 전환을 하고 있는 것이다. 분단 이후 강산이 일곱 번 바뀐 올해, 조성만(요셉)이 그토록 바라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이사야 2,4) 새 역사를 쓰는 여정이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올해 평화로 나아가는 여정에 서서 조성만(요셉) 30주기를 맞아 그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부활하는 내 한반도여!’라는 주제로 다양한 추모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5월 15일 저녁 7시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추모식에 이어 5월 19일에는 광주 망월동 묘역 순례가 예정되어 있다. 그리고 5월 31일, 30년 만에 처음으로 명동성당에서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주관하는 ‘고 조성만 30주기,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분들을 위한 미사’가 유경촌 주교의 집전으로 예정되어 있다. 그리고 9월에는 ‘한반도 평화와 조성만(가제)’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이 준비되고 있으며, 10월에는 ‘평화 콘서트’가 예정되어 있다. 한반도 평화라는 길의 입구에 선 올해만큼은 조성만(요셉)도 하늘에서 미소로 우리와 함께할 것 같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한반도에 강림하기를 빈다.
# 추모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루기 위해 후원 모금을 하고 있습니다. 후원은 신한은행 110-127-380181 이원영 계좌로 직접 송금하거나, 소셜펀치(https://www.socialfunch.org/jsm30)에 접속하여 참여할 수 있습니다. 뜻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이원영(프란치스코)
서울대학교 한국정치연구소 연구원
통일열사 조성만 30주기 추모사업위원회 집행위원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