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래군의 인권이야기)조성만과 금단의 선을 넘은 사람들
판문점에서 남과 북을 가르는 경계선은 약간 도드라진 시멘트 블록이었다. 지난 4월27일 오전 10시30분경 김정은 위원장이 군사분계선을 넘어왔다. 그러자 문재인 대통령은 “저는 언제쯤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고, 김정은 위원장은 “그럼, 지금 넘어가볼까요.”라고 답하고는 손을 잡고 북으로 살짝 넘어갔다가 다시 남으로 돌아왔다.
역사적인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다. 저렇게 살짝 넘어갔다가 넘어올 수 있는데 우리는 아직 분단의 벽 속에 갇혀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이 분계선을 넘어올 때 11년 전의 노무현 대통령이 떠올랐다고 했다. 2007년 10월4일 평양으로 향하던 노무현 대통령은 차에서 내려 분사분계선을 걸어서 넘었다.
나는 두 정상이 남과 북의 분계선을 넘을 때 29년 전 8월15일, 판문점을 통해 넘어오던 한껏 긴장된 얼굴 표정의 임수경과 문규현 신부가 떠올랐다. 서슬이 시퍼렇던 노태우 정권 때인 그해 임수경은 전대협 대표로 평양에서 열리던 세계청년축전에 참가해서 ‘통일의 꽃’으로 환영을 받았다. 천주교 신자였던 임수경을 도와 함께 남으로 내려오기 위해 방북했던 문규현 신부는 당시 “죽으러 가는 심정”이었다고 술회했다. 그때는 그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정전협정일인 7월27일 판문점에 도착했던 두 사람은 유엔사의 불허와 북한 당국의 회의적인 태도로 판문점을 통해 남으로 내려오지 못했다.
그 뒤 8월15일, 두 사람은 두 손을 꼭 잡고 “금단의 선”을 넘었다. 김구 선생이 1948년 4월19일 분단선을 넘은 지 41년만이었다. 남으로 내려오자 곧바로 연행된 두 사람은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 지령 수수, 잠입탈출, 고무찬양 혐의 등으로 5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살이를 하다가 1992년 말에 가석방으로 석방되었다. 그 뒤를 따라 정주영 회장이 소떼를 몰고 방북했고, 노무현 대통령이 넘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넘은 그 선을 넘기 전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시도와 희생이 있었다. 역사는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게 아님을 새삼 보게 된다.
그런데 문규현 신부가 방북을 할 때 그의 등을 떠민 사람이 있다. 그의 형인 문정현 신부였고, 고 조성만이었다. 1988년 5월15일, “척박한 땅, 한반도에서 태어나 인간을 사랑하고자 했던 한 인간이 조국통일을 염원”하던 그는 명동성당 가톨릭회관 옥상에서 유서를 뿌리고 할복한 뒤 투신하여 운명하였다. “통일을 얘기만 해도 역적으로 몰리던” 세상에서 그는 온몸을 던져서 “한반도의 통일은 그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막아져서는 안 됨”을 주장했다.
그의 죽음은 문정현, 문규현 신부 두 형제 신부를 분단의 현실에 눈뜨게 하는 벼락이 되었다. “7000만 겨레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근본 원인이 ‘남북 분단’이라는 사실을 절절이 깨닫게” 한 조성만을 문규현 신부는 “진정한 사제”라고 평가했고, 문정현 신부는 “스승”이라고 했다. 조성만의 죽음은 그해 3월 서울대총학생회장 후보로 나섰던 김중기가 제창했던 조국통일운동이 청년학생들의 주요 과제로 자리 잡게 했다. 1989년 4월에는 문익환 목사가 북경을 거쳐서 평양에 들어가 김일성 주석을 만났고, 그런 뒤에 임수경과 문규현 신부가 판문점을 통해 남으로 돌아왔다.
역사의 순간은 갑자기 오지 않는다. 금단의 선을 넘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감옥에 갈 수도 있는 상황에서 분단의 현실을 깨고자 했던 이들이 어디 한 둘이겠는가. 오늘의 남북 정상회담에는 이런 수많은 이들의 죽음을 각오한 선행(先行)이 쌓이고 쌓인 결과이지 않을까 싶다. 남북의 분단의 벽을 허물기 위해 헌신하다 고초를 겪고 죽어갔던 이들을 남북 정상회담의 성과와 함께 기억하고 싶다. 그리고 기본적인 인권의 포기를 강요하고 대결과 긴장과 고통의 분단체제를 존속시켜온 국가보안법의 역사에도 종지부를 찍히는 날도 하루라도 빨리 보았으면 좋겠다.
오는 5월15일은 조성만의 30주기다.
박래군 뉴스토마토 편집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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