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군인 부사관이었습니다. 7년 정도 지났을까요? 새로운 길을 찾고 싶어 인근 대학 사회복지학과 야간 과정의 문을 두드렸지요. 사회복지 현장실습을 통해 처음으로 나눔의 집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를 추천한 학교 교수가 다름 아닌 안신권 나눔의 집 전 시설장이었기 때문이에요. 실습기간 동안 할머니들과 정이 들었던 터라 실습이 끝나고도 도와드리고 싶은 마음에 봉사활동을 몇 달 동안 하기도 했지요.
마침 직원 채용이 진행되어 운 좋게도 2018년 10월에 이 곳에 입사를 하게 됩니다. 시설의 비리를 깨달은 건 고작 한 달도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수억 원의 기부금이 들어오는데도 정작 할머니들이 입는 옷은 하나같이 다 낡은 것들이었어요. 제공하는 프로그램이라 해봤자 종교활동 외에는 없고 할머니들의 자유로운 외출도 금지했지요. 기본적으로 필요한 식료품, 간식, 생활용품은 후원금과는 완전히 별개였어요. 치약이 없어 예산으로 구매를 했다가 혼이 나기도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저 후원되는 물품을 받아쓸 따름이었어요.
안신권 시설장과는 학교 때부터 쌓은 연 같은 게 있었지만, 할머니들의 현실을 알고부터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어요. 할머니들에게 해도 해도 너무 했으니까요. 제가 배우고 생각한 사회복지의 상식을 완전히 배반하는 곳이었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함께 근무하는 그 누구라도 실상을 모를 수 없는 구조였기 때문에 우리는 내부에서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번번이 가로막혔고, 또 건의하고 다시 좌절하고의 무한 반복이어었어요.
그러다 그 유명한 PD수첩이 방영됩니다. 방송 시각에 공익제보 직원들이 한데 모여 펑펑 울면서 봤습니다. 그 눈물은 그동안 힘들었던 기억을 딛고 이제는 다 끝났다는 의미였던 것 같아요.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으니 국민들이 다 해결해 줄 거라는 기대와 확신으로 희망을 품었습니다.
하지만 현재 나눔의 집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할머니들을 대하는 마음과 우리의 삶만 달라졌습니다. 지금은 공익제보에 나선 것을 후회하기도 합니다. 괜히 이 난리를 쳐서 할머니들이 그나마 누렸던 것들조차 더 어려워진 것은 아닌지, 죄책감과 죄송한 마음 탓에 요즘은 할머니 얼굴을 뵙기도 힘듭니다. 그리고 저에게는 ‘공익제보자’라는 딱지가 붙었습니다. 직업군인 생활 이후 제2의 인생을 나눔의 집에서 시작했는데, 원치 않게 도래하게 된 제3의 인생을 과연 어디서 어떻게 시작할 수 있는 건지, ‘공익제보자’인 저로서는 막막하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