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표액 2,000,000원 중 42%
  • 840,000
  • 후원 마감
  • 26 명 후원
  • 이 후원함은 2016-09-09에 종료되었습니다.
  • 후원마감

2016부산오프오프영화제를 기획하며

2016/09/21

2016 BOFF 영화제를 기획하며

-대안문화연대 이성민

2015BOFF 영화제를 기획했던 우리는 그 해 생탁, 택시노동자들의 생존권투쟁을 걸머쥐고 부산시청 광고탑위에 오른 두 노동자의 투쟁에 연대하기위해 벼락치기 수능공부 하듯 영화제를 치렀습니다. ‘문제적 공간에서, 문제적 영화를이라는 슬로건 하나만 달랑 내 걸고 돈키호테처럼 대 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이 영화제가 어떤 고민 속에서 나왔고 왜 하려는지 설명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해서, 2016 BOFF 영화제를 기획하며 우리는 왜 이러한 영화제를 하려 하는지 우리의 문제의식들을 밝히고 공유하려 합니다.

 

한국영화의 효시는 1919년 극단 신극좌의 김도산 등이 의리적구투(義理的仇鬪)라는 연극 공연에 사용키 위해 촬영한 영상물이라는데, 당시에는 이런 극형식을 <연쇄극영화(連鎖劇映畵)>라고 불렀답니다. 추측컨대 현대연극의 키노드라마와 비슷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무튼 이 작품에 삽입된 영화를 한국인의 손으로 만든 한국영화의 효시로 본다고 합니다. 제작은 단성사 대표였던 박승필이 맡았고, 김도산, 이경환 등이 출연했다는데, 내용은 주로 권선징악을 주제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 후 192349일 개봉된 월하의 맹서(月下의 盟誓)가 본격적인 영화로는 첫 작품이라고 합니다, 규격은 35밀리 3()의 무성영화로 일종의 계몽영화였답니다. 윤백남이 각본·감독을 겸한 이 영화는 전국에 무료 상영되었고 조선총독부 체신국이 저축 장려를 위해 만든 영화였다 하니 한국영화 첫 걸음은 일제 정책홍보로 시작한 셈입니다. 어쨌든 한국영화의 역사는 2016년 현재에서 보면 1919년을 기준으로 삼으면 97년이고 1923년으로 계산하면 83년이 되는 셈이니 백년이 채 못 된다는 얘깁니다. 그럼에도 지금의 한국영화는 양적으로 질적으로 엄청난 수준에 이르렀고 이제 영화는 가늠하기 어려운 이윤을 창출하는 명실공히 엔터테인먼트 entertainment산업 중심이 됐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산업이 된 한국 영화를 한 꺼풀만 들춰보면 참담한 상황들과 마주하게 됩니다. 겉으로 드러난 화려한 외형과 달리 그 속은 처참하리만치 곪아 있다는 겁니다. 이제 몇 가지 단면들을 짚어 보겠습니다.

 

2001425일 대종상영화제 시상식이 열린 서울 광화문의 세종문화회관 앞. 붉은 카펫을 밟고 행사장으로 들어가는 스타들을 향해 수백 개의 카메라 셔터가 쉴 새 없이 찰칵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스타들을 향해 고정된 카메라 시선 바깥에는 조용한 시위 현장이 있었습니다. ‘40억 영화에 연봉은 200만원’, ‘제작자=반칙왕’, ‘표준계약제 실시하라라고 적은 피켓을 든 22명의 시위대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침묵시위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위 스타라 불리는 배우 누구도 이들에게 눈길한번 마주치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달 518일 금요일 오후 5, 혜화동 민들레 영토에서 이들은 또 다시 모임을 가졌습니다. 이 날로 9번째 정례 모임을 가지는 이들의 모임이름은 비둘기 둥지’. 충무로 영화스텝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만든 모임이었습니다. 이들은 충무로에서 제작되어지는 영화의 궂은일을 도맡아 왔던 촬영부, 연출부, 제작부를 비롯한 여러 파트 영화 종사자들로 대한민국 충무로 영화를 존재하게 하는 버팀목이요 토대인 영화산업 최전방 노동자들이었습니다. 화려한 영화제의 레드카펫을 밟는 배우가 있게 하고, 스타급 감독이 만들어지게 하며, 한국영화의 천만관객시대가 가능하게 하는 충무로의 실질적인 힘이 바로 이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일상은 참담했습니다. 대한민국 노동자 최저임금은 고사하고 년 봉 오백에도 못 미치는 극빈 생활자가 한둘이 아니니까요.

“-삼삼오오 모여든 비둘기들은 약 50여명. 표준계약서, 개별계약제 등 구체적으로 어떤 요구를 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심지어 노조를 설립하자는 이야기 등 여러 주제를 놓고 3시간 넘도록 열띤 토론과 자유발언이 진행되었다. 김영철 촬영감독은 시종일관 열띤 어조로 이것은 권익에 대한 문제다. 여러분 개개인이 당사자다. 개개인이 나서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아무리 많이 모여서 집회를 하고 시위를 해도 나중에 계약서를 앞에 놓고 내 권리를 주장하고 관철시키지 못한다면 이길 수 없다며 후배들에게 분발을 촉구했고, 자신이 계약할 때의 예를 들어 구체적인 설명을 해주기도 했다.-”2001-05-25 씨네21

그 날로부터 15! 지금 대한민국 영화계, 또 그날 그들의 오늘 이곳은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변한 것이 없습니다.

 

20093월 일명 장자연 사건이라 불리는 여배우 자살사건과 재벌언론 여배우 성 상납강요 스캔들이 언론에 보도되자 세인들은 충격에 빠집니다. 이 사건은 파렴치한 재벌언론의 행태뿐만이 아니라 한국영화/연예산업 전반에 널려있는 엔터테인먼트사란 곳이 젊은 여배우들을 어떻게 성 노리개로 삼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연루된 인사들의 면면이 드러날 만큼 드러났음에도 명쾌하게 해결되지 않은 채로 세간의 관심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린 여배우 지망생들의 꿈과 욕망을 볼모로, 착취하고 갈취하는 연예기획사가 그곳 하나뿐이며 그 사건 이후로는 그러한 행태가 사라졌겠냐는 겁니다. 이 또한 한국영화계의 그늘이고 음지 인 것입니다.

2011129일 한국영화산업시스템은 또 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갑니다.

시나리오작가 최고은씨가 굶주림과 지병에 시달리다 숨진 채 발견 된 이 사건은, 이 땅에서 드라마작가 특히 영화시나리오작가가 무명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아프고 서러운 것인지 통렬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죽기 전 고은씨는 이웃 송 씨의 방 앞에 창피하지만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주세요란 쪽지를 남겼답니다. 월세는 몇 달째 밀렸고 가스도 끊겨 있었습니다. 경찰은 갑상선기능항진증과 췌장염을 앓던 최씨가 며칠 동안 굶은 상태에서 치료받지 못해 숨진 것으로 발표했죠. 그리고 이 일로 국회와 문화예술계가 최고은법운운하며 적잖게 술렁이고 뭐라도 할 듯 잠시 요란을 떨었지만 영화산업시스템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고 역시 세월 속에 묻혀 지워지고 있습니다.

2015년엔 배우 김운하씨가 고시원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습니다.

막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김씨가 숨지기 전 극단에서 받은 월급은 약 30만원이었다고 합니다. 이어 또 한사람의 영화배우 판영진씨도 차 안에서 숨진 채로 발견됩니다. 판씨는 차안에 타서 재가 된 번개탄과 자살을 암시하는 문자 메시지를 남겨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경찰은 추정했습니다.


위의 몇 가지 사례는 한국영화산업시스템이 빚은 수많은 그늘 중 지극히 단편적인 것들입니다. 또한 열거한 내용들은 주로 시스템 즉, 제작 환경에 관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한국 영화산업 아니 산업영화의 문제는 제작환경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영화의 밑그림이 되는 소재의 선택과 주제의식에도 우리는 문제의식을 강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예술은 현실의 반영이며 우리가 사는 시대에 어떤 문제가 있다는 데에서 출발하는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현실을 비켜가는 판타지예술이 고단한 일상을 비켜 쉬어가는 오락적 순 기능이 있음을 결코 부정하진 않지만 모든 예술, 모든 영화가 하나같이 현실 도피적 오락적 역할만 탐닉해야한다면 차라리 코카인이나 헤로인을 권하는 게 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Off보다 한 걸음 더 나가 Off-Off를 슬로건으로 앞세우고 인디(INDIE)를 전략적 테제로 삼는 까닭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인디가 이상합니다. 살펴보건대 대한민국 문화 예술계의 인디는 어처구니없게도 무엇으로부터 인디, 즉 무엇으로부터 독립인지 불명확하거나 매우 단편적이라는 사실과 마주합니다. 홍대 앞 인디밴드는 전혀 인디스럽지(?) 않은 기실 언더밴드 이상도 이하도 아니더군요. 심지어 인디가 뭔지도 모르면서 인디밴드라고 주장하는 희귀한 밴드도 있습디다. 자신 있게 주장하는 친구들도 매우 두루뭉술하게 대 자본(!)으로부터 독립이라거나 상업주의와 다른 비상업주의 예술 행위 등을 인디로 운운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점을 명확히 아니 INDIART운동의 선언 의미를 말 바꾸기 하지 않고 정확히 하려합니다. 첫째, 자본(-주의, 시장주의)논리로 부터 독립. 둘째,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로 부터 독립이라는 인디의 본래 의미를 고수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Off-Off를 지향하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해 부터는 다음과 같은 기획 원칙을 세우려 합니다.


먼저, 영화제는 성 상납 강요 및 살인적인 작업환경과 저임금에 치여 스스로 생을 마감한 배우와 영화인들을 기억하는 묵상으로 시작 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1. 영화제를 중심에 두고 여러 장르의 인디예술이 함께 어우러지게 한다.

2. 테마(Theme)가 있는 영화제를 고수한다.

3. 한국영화의 과제를 정해 토론하는 프로그램을 병행한다. (매년 1주제)

4. 모든 경비는 수용자들의 후원으로 조성한다.

5. 참가한 감독들의 작품은 여러 영화제로 확산 및 여러 공간에서 상영 되어 질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한다. 

공유해서 동의되면 함께 해 주십시오.